일본 제국 육군
[clearfix]
1. 개요
1867년부터 1945년까지 존재했던 일본 제국의 육군. 현재 일본에선 '구(舊)일본제국 육군'이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1871년(메이지 4년)에 세워진 것으로 보나 영어권에서는 메이지 유신 당시에 천황을 호위했던 사무라이 근위대를 시작점으로 본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과장 보태서 육군 직할령이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해군보다는 육군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더 있었던 듯 하다.[3]
2. 역사
[image]
1864년 프랑스식 훈련을 받고 있는 쇼군 소속의 부대(막부육군).
막부 -가 무너지면서 이들은 일본군에 흡수된다. 공식적으로 '''대일본제국 육군'''이란 거창한 호칭을 사용한 것은 1877년(메이지 10년) 이후의 일이다.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이 제정되면서 군사 권한은 내각이 아닌 천황의 통수권에 속하게 되었다. 육군의 최고 지휘관은 대원수로 천황을 뒀고 육군은 육군대신(육군장관), 육군참모총장, 교육총감의 세 장관이 관리했다. 웃긴 것은 이들은 대장이 아니라 중장이 한다.(대장도 있긴하다) 최고 보직과 최고 계급이 일치하지 않는데 이런 일본군의 괴상한 특징은 병과가 계급을 씹어먹는 문제를 나중에 일으키기도 한다. 육군대신은 육군성(한국으로 따지면 육군만 지휘하는 국방장관, 이전 서술된 육군청은 한국에는 없는 조직. 1947년 이전 미군도 육군성, 해군성으로 편제됨), 참모총장은 참모본부(육군본부), 교육총감은 교육총감부[4] 를 지휘했다.1938년(쇼와 13년)에는 항공 전력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육군항공총감부가 설치되었다.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도 세웠고 여기 출신들은 패전이후 항공자위대의 초기 인원이 된다. 나중에 참모본부는 대본영에게 권한을 많이 이임하게 되나 군정권의 상당수는 유지된다.
기원은 1871년 조슈와 사쓰마, 토사 등에서 징집된 천황 직속의 어친병(御親兵)이다. '''폐번치현'''이 이뤄지자 이들 어친병은 근위대가 되었다. 처음엔 사무라이 출신들로 군을 유지했지만 곧 국민개병제를 도입할 계획이었다. 이 과정을 주도한 것은 야마가타 아리토모였다. 1874년에 징병령이 선포됐다. 그러나 징병제가 '사무라이를 모독한다'고 생각한 기존의 사족들은 불만이 많았다. 특히 정한론을 주장하다가 권력에서 밀려난 사이고 다카모리가 하야하면서 그를 따르는 장교들이 대량으로 사직했다. 이후 세이난 전쟁이 일어난다. 서남전쟁은 하야한 군인들과 남은 군인들이 벌인 것으로 칼을 들고 싸운 전쟁이 아니라 신식군대끼리 총들고 싸운 것이다.
[image]
1875년경의 일본 육군 장교들.
1874년 타이완 반도를 침략했다. 일본에선 이를 '''외정(外征)'''이라고 한다. 1885년엔 프로이센의 소령을 교수로 초빙했고 대대적인 개혁이 이뤄졌다. 1894년에는 당시 동아시아 최대이자 최강이라 생각됐던 청나라의 군대를 패배시켰으며 1905년에는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사실상 동아시아에선 가장 강력한 군대가 된다.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영일동맹에 따라 연합국으로 참전해 독일 소유인 칭다오와 태평양의 섬들을 차금차금 점령한다. 전쟁으로 일본은 경기 붐이 일고 경제 규모가 급속도로 팽창한다. 또한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백군을 돕는다는 이유로 일본군을 시베리아로 파병했다.
[image]
1900년대의 일본군 육군 복장.
1920년대에는 다소 군축한다. 그러나 현역만을 줄였을 뿐 교련 제도를 창설하고 예비 장교를 계속 확보했다. 당시 일본 육군의 규모는 평시 편제의 1/3 수준인 10만명을 군축해 20만명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일본군은 다시 확장된다.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소련과는 불가침 조약을 맺는데 그 동안 해군이 '''미국'''과 전쟁을 일으킨다. 1941년 일본 육군은 51개 사단 규모였다. 숫자는 약 170만이었다. 영국과 미국은 중화민국 정부를 적극 지원했고 소련이 1945년에 일본에 선전포고하면서 일본 육군은 완전히 패배한다. 관동군 중 상당수는 소련에 포로로 끌려가 살이 에는 노역장 신세를 져 생을 마감하는 일본군도 있다. -
[image]
1938년에 바뀐 전투복.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옷이다. 1945년 무렵이면 이거마저 만들 돈 아낀답시고, 국민복에 부착물만 바꿔 육군복으로 쓸 수 있다는 규정을 만들어 신병들에게 군복 조차 지급 안 하는 꼼수까지 부렸다.[5]
규모로 볼 때 1870년에는 1만2천명 수준이었다. 그러던 것이 1900년대에는 12개 사단으로 38만명이 현역으로 근무했다. 1941년에는 41개 사단에서 46만명이 현역으로 일했는데 2개 사단이 조선반도와 일본에 주둔했고 12개 사단은 만주, 27개 사단은 만주를 제외한 중국에 주둔했다.
1945년에는 145개 사단에 5백만 명 규모였다. 최대로 컸을 때는 609만 명이었다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150만 6천 명이 전사했으며 비전투 상황에서 사망한 인원을 합치면 256만 6천 명 수준이다. 민간인 사망자는 67만 2천 명이며 상당수는 오키나와 출신이다. 81만 명이 실종됐으며 7천5백 명이 연합군에 포로로 잡혔다. 포로의 비율이 비정상적으로 낮다. 대만 침공 때는 543명이 사망[6] 했고 청일전쟁 때 13,823명, 러일전쟁 때 8만 명[7] 가량이 사망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칭타오에서 영국군과 연합을 맺어 독일-오스트리아 군과 싸워 1,455명이 전사했다.
3. 육군 항공대
공식적인 '일본 육군 항공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미국의 육군 항공대가 미 육군의 인사나 군수와는 따로 놀던 사실상 거의 독립된 군종이었던 것과 달리 일본 육군 항공대는 육군에 철저히 귀속됐다. 주력이 되는 '육군비행전대(陸軍飛行戰隊)'가 있었지만 육군항공대, 육군비행단, 육공군, 공군 등의 호칭이 사용되었다.
1905년 러일전쟁 때부터 풍선 부대를 편성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처음으로 비행기가 편성된 항공부대를 만들었다. 1915년에 임시 항공대는 항공 대대로 확장됐고 1917년엔 6개 대대로 증가했다. 1919년엔 육군항공본부가 생겼고 1925년엔 항공 병과를 독립시켜 육군항공 사령부를 개설하였다. 일본 육사 내에 있던 항공 병과를 독립시켜 1935년에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를 세우기도 했다.
육군 항공대의 인원 상당수는 항공전력의 공백이 있던 일본 자위대에 1954년 항공자위대가 나타나면서 상당수 흡수됐고, 대한민국 공군의 초기 인원[8] 에도 일본 육군 항공대 출신이 상당수 있었다.[9]
4. 인원 선발
건군기에는 조슈[10] 출신들이 독점했으며 장교를 기존 일본의 사족 개념으로 파악했다. 일본육군사관학교가 생기면서 육균유년학교를 거친 뒤에 사관학교에 들어가 교육을 받은 뒤 장교로 임관하거나 육군교도단(陸軍敎導團)을 거쳐 부사관으로 임관한 뒤에 육군사관학교로 가는 것도 가능했다. 1917년에는 준위후보자(후보생), 1920년엔 소위후보자(후보생) 제도를 설치해 준위나 병장, 선임부사관 등에서 우수한 인원을 뽑아 소위로 임관시켰다. 1938년에는 일본육군항공사관학교가 설치되었다. 1883년부턴 국립과 공립, 1889년부터는 사립을 불문하고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지닌 자는 '1년 현역제'란 이름으로 예비 장교에 지원 가능했고 이 제도는 1927년(쇼와 2년)부터는 갑종간부후보생이란 이름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갑종장교가 육사 출신보다 숫자가 더 많았다. 1941년(쇼와 16년)에는 특별지원장교 제도가 생겼다. 까놓고 말해 인원 딸리니까 제도를 늘린 것이다. 나중엔 조선이랑 타이완에서까지 장교를 뽑았다.
1927년에 재정된 병역법에는 징병검사 결과로 만 20세 이상의 건장한 청년들을
갑종(현역)
제1을종(제1보충역)
제2을종(제2보충역)
병종(제2국민병역)
정종(병역면제)
무종(다음해 재검사)등 6단계로 나눴다.
갑종과 을종은 제1국민병역에 해당하며, 그중 제1을종은 기초군사훈련까지는 받도록 하였다. 현역 복무기간은 1927년까지는 2년 6개월이였지만 우가키 군축으로 인해 2년으로 줄어 유지되었다. 현역 복무 후에는 예비역 5년 4개월과 후비역 10년이 있으며 이중에서 12년 4개월 까지를 보충역으로 계산하여 을종과 함께 동원 가능하도록 법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1933년까지는 징병제라고 해도 현역 징집률이 겨우 20% 밖에 안되었다. 일본군의 기본 군사 전략이 소수정예를 지향하는 것도 있지만, 그 소수를 차량화/기계화/중무장화 시킬 장비가 없는 상태여서 더 이상 뽑아도 어차피 소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중일전쟁 발발로 엄청난 병력 소모가 있자 과거에는 군대에 안 가던 제1을종, 나중에는 제2을종까지 징집하여 37년에는 징집률이 25%로 올라가고 40년에는 무려 50%까지 올라갔다.
그럼에도 병력 부족 사태는 심각하였다. 특히 일본군의 병역제도는 평시에 상비사단 17개 체제로 짜여져 있는데 1938년까지 정확히 두배인 총 34개 사단 115만명으로 늘어 난다. 여기에 일본군은 평시에 비해 전시에는 사단 병력이 2배로 늘어 난다. 결국 평시에 비해 딱 4배의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는 현역 2년외에 예비역 5년 4개월을 전부 동원해서 복무해도 평시 병력은 3.67배 밖에 안되어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을종까지 동원하여 전시 34개 사단 병력을 채우게 되었다. 그중에서 제2을종의 경우 아예 군사교육을 해놓지 않았기 때문에 ‘임시 소집’이라는 이름으로 사단 병력을 보충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기존의 소수 정예제에 비해 질적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래도 병력이 부족하였다. 39년에는 8개 사단 증설, 40년에는 7개 사단, 41년에는 2개 사단이 증설되어 총 51개 사단 210만명이 되었다. 결국 1939년에 대량소집을 위한 법개정이 이루어져 기존의 보충병역 12년 4개월이 17년 4개월로 연장되었다. 최고 38세의 남성까지 소집이 가능해졌다. 다시 말하자면 예전에는 도저히 군인으로 써먹을 수 없던 체격과 나이까지 소집되어 질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지게 된다. 거기다 현역들이 예비역들을 사람 취급 안하고 개무시 하는 건 덤.[11][12]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4년에는 이래도 부족하여 징병연한을 20세에서 19세로 낮추고 현역 징집률을 '''77.4%'''까지 올렸다. [13] 이 과정에서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과 대만에서도 징병제를 실시해 조선인과 대만인도 징집했다. 육군 총병력은 99개 사단 420만명에 달했다. 덕분에 이미 심각하게 상태가 안좋았던 41년과도 비교도 안되게 질적으로 심각하게 떨어지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의 징집률은 90%가 넘어가게 된다''' 아직도 문제를 못고친 셈이다.[14]
장교 부족도 심각하여 1939년의 경우 전체 장교 6만 700명에서 소좌 정원 7,366명중 4,231명(57.4%)만 채우고, 대위는 더 심각하여 정원 1만8,597명중에 7,191명(38.7%) 밖에 안되었다. 게다가 채워진 인원들도 상당수가 예비역 장교로 39년 기준으로 현역 비율은 36% 밖에 안되어 소좌가 83.1%, 대위가 77.7%, 중소위의 경우 겨우 21.2%였다. 그바람에 본래 소좌가 맡아야 할 대대장을 대위가, 대위가 맡아야 할 중대장을 중소위가 맡는 것이 보통이였다. 덕분에 이전까지처럼 진급시킬때 연공서열따위에 목을 메던 것도 사라지며 중위 임관한 장교가 1년만에 소좌가 되는 경우까지 생겼을 정도.[15] 평시, 아니 태평양전쟁 초반, 아니 1944년 전만 해도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45년에는 육군 전체 장교가 25만명 까지 늘어났지만, 현역 장교 비율은 무려 19%까지 떨어 졌고, 정원 충족률도 74%까지 떨어진다. 대대장(소좌), 중대장(대위)의 경우 현역은 20~40% 정도였으며, 정원 충족률은 겨우 70% 정도였다.
장교 1인당 사병의 수는 39년에는 17.5명이었지만, 45년에는 24.6명에 달했다. 같은기간 미 육군은 39년에는 12.1명, 43년엔 11.1명, 45년엔 8.3명으로 오히려 장교 비율이 점점 올라갔다. 참고로 미군은 39년 총병력 10만명에서 45년엔 1,000만명까지 늘어났다. 즉 일본이 추구하는 ‘소수정예’는 오히려 미군에게 붙여줘야 할 명칭이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급도 속성으로 이뤄지게 되면서 1939년에 졸업한 육사 52기 생들이1944년에 딱 5년 장교생활 하고 소좌를 단 인원들이 있었고, 1933년 졸업한 1912년생 중좌가 있을 정도였다. 20대 소좌와 30대 초반 중좌라는 건 태평양전쟁 초기만 해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하사관 선발은 대부분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민간에서 바로 받지 않고, 병사 중 우수한 자원을 선발하여 임명하였다. 일등병 중 상등병 진급이 될 만한 대상인 상등병후보자를 뽑은 후 상등병후보자특별교육을 실시, 그 적임자로 상등병 진급자를 뽑고, 그 중 오장이 되기를 원하는 자나 전역한 후 하사관에 지원하는 자들[16] 중에 선발해서 1년동안 육군교도학교나 아니면 각 부대의 하사관 교육 기관에서 1년 교육 후 오장이 되었다. 그리고 4년동안 근무가 가능했고, 그 뒤는 재임용 신청을 해야 하는데 이 경우 근무성적이 좋지 않다면 안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17] 다만 특수한 직렬의 경우는 한국같은 민간 부사관 비슷한 제도가 없는 건 아니었는데, 육군 항공비행학교나 정비학교 졸업생의 경우는 상등병 임관 후 6개월에서 1년 정도의 수습단계를 거쳐서 오장으로 임용하기도 했고, 헌병 등의 분과에서는 시험을 쳐서 훈련병 중 괜찮은 인원들을 상등병으로 임용시키기도 했다. 뭣보다도 도시의 배운 사람을 현역병으로 받아들이기 무서워했던 일본군 특성상 '예비역오장' 이라는 특이한 제도도 있었는데 구제중학교 졸업자를 대상으로 '을종간부후보생' 이라는 걸 뽑아서 훈련을 시킨 다음 예비역에 편입, 병역의무를 마치게 만드는 제도였다. 그리고 전쟁이 한참 지속되면서는 하사관 부족해지자, 아예 신병훈련을 받을 때 일정 학력 이상의 병사들을 대상으로 평가를 봐서 임용 시 계급 자체를 다르게 주기도 했다.
병사 계급은 이등병과 일등병, 상등병으로 구성됐으며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 9월에 병장이 신설됐다.[18] 일병까진 대체로 그냥 올라갔지만 상등병은 중대 당 1할의 인원 제한이 있었고, 진급은 시험 등 검열로 이뤄졌다. 일본 육해군 병사/수병 계급은 무조건 근속년수로만 올라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계급이 높다고 꼭 선임인 것은 아니었으며, 후임이라도 먼저 진급하면 상하가 뒤집혀 이전에 자신을 갈구다 후임이 된 선임에게 복수를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또한 상등병으로 선발되어야 헌병이나 통신병 등 고급 기술을 배우거나 권한이 많거나 편한 특기를 재배정받을 수 있었기에 많은 병사들이 진급을 위해 노력했고, 고향에서도 전역시 상등병이나 병장 전역자(1940년 이전에는 오장 이상 전역자)라면 거의 가문의 영광급으로 우대를 받았다. 특히나 일본군 하사관이라는 건 지금 우리나라 군대와는 다른 점이 있어서, '장교가 아니지만 군에서 근무하는 직장' 이라는 의미보다는 '징집병 입대자들 중에서 무척 우수하다고 평가받은 인원' 이라는 의미가 강했고[19][20] , 일본사회 자체가 군국주의화 되기 전부터도 군대나 사회나 크게 다를 바가 없어서, 군대에서 적응 잘 하고 인정받은 인원이라면 사회에서도 그럴 수 있는 사람으로 충분히 통했기 때문에 저런 측면이 강했다. 당장 실질적인 이점들이 있어서 하사관 전역자라면 경찰 채용이나 공무원 채용 등에서 직접적인 우대를 받았고, 다른 곳에 취업하기도 굉장히 유리한 편이었다.[21] 또 오래 복무한 하사관들의 경우는[22] 퇴역시 소정의 은사금이 나오기도 했는데, 이게 시골에 땅을 좀 마련할 수준은 되었다고...[23] 다만 시골출신들이 많고, 아무래도 배우거나 부유한 집의 자제들이 할 만한 일이 아니다 보니 은근슬쩍 하사관 무시하는 말들도 떠돌고는 했는데 '멍청한 놈은 하사관 지원하는 놈' '근데 더 멍청한 놈은 그걸 또 한번 하려고 하는 놈(4년 복무 후 4년 연장복무 신청하는 사람을 가리켜 하는 말...)' 이라는 식의 말들이 사회에서 떠돌았다고 하고, '복숭아나무 밤나무는 3년, 감나무는 8년 바보조장(상사)은 12년(12년 이상을 복무해야 매년 평생동안 은사금이 나왔다. 멍청한 놈이 밖에선 할 일이 없어서 조장달고 은사금 나올 때까지 버티고 있다는 말...)' 이라는 말도 있었을 정도로 사회에서 할 일 없는 놈이나 저기서 말뚝박고 있는 데더라 식의 인식도 없지는 않았다니, 우리네 부사관 취급과 비슷한 면도 없지는 않았다. 특히 경기가 좋아서 괜찮은 일자리가 많을 때는 더 그랬다고.... 육군 병사의 의무 복무 기간은 2년이었다.
4.1. 병역 기피
창군 시절인 메이지 시대 초기부터 패전으로 해체된 2차대전까지의 기간을 보면 병역기피자도 꽤 있었다. 홋카이도에 있으면 병역이 면제된다고 해서 본적을 홋카이도로 옮겨버린다든가 하는 식으로.[24] 이공계 학교의 경우에도 병역을 면제해줬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때 이공계로 가서 병역을 피한 사람도 많았다. 아니면 군무원이 되어서 근무하든가. 오진으로 징병을 피한 경우도 있는데 미시마 유키오가 대표적이다. 징병검사를 통과했지만 군의관이 기관지염을 결핵으로 본 탓에 귀가 조치됐다. 소수이긴 하나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기도 했다.[25] 평화주의자나 좌파들도 병역거부를 했으나, 전자는 언론통제로 대부분 보도되지 않고 비국민 취급을 받았고, 후자는 코로 소바를 취식한 후 감옥에 가거나 전향했다.
군국주의 국가였다고 해도 당시 일본은 사실상 빠져나갈 구멍이 많았다. 1945년 패전 직전에조차도 입영율은 50%가 되지 않았다.[26] 당시의 행정체계의 허술함도 한 몫 했지만, 차일피일 미루고 '다음에 가겠다'고 하다가 군수 공장이나 주요 기간산업 시설에 취직하는 식으로 징병을 피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27] 병역기피 중 가장 확실한 방법은 뇌물을 주는 것이었다. 지방의 관리사무소나 구청의 병사관리 창구 담당자에게 뇌물을 줘서 '특수기술자'로 등록하여 병역기피를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28]
징병은 남자로서 꼭 거쳐야 하는 관문처럼 취급되었기 때문에, 징병을 피한 사람들은 다소 하자가 있는 사람으로 취급되거나 나약한 사람 취급을 당했다. 그런 반면에, 사람사는 곳이 다 비슷한 면이 있듯 전쟁 이전에도 징병검사때가 되면 동네 절에 가서 군대 안 가게 해달라고 빌거나 하는 일도 나름 일상적인 일이었는데, 군대를 가게 된다고 쳐도 그냥 건강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거니 좋은 일, 안 가게 되면 안 가게 되니 좋은 일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생각보다 징집율이 높지 않아서[29] 군대를 안 가게 된다고 해도 크게 병신취급을 받는 건 아니었고, 군대가 좀 위험하고 부담스러운 곳이기는 해도 사회 분위기가 군인에게 우호적인 면도 있다보니 군대 갔다 오면 유무형의 보상도 있고 해서 가능한 현상. 사회 전체적으로 일반인보다는 군 병사 대우가 나은 편이라 시골의 가난한 집 출신들 중에는 군대가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또 병역법에는 엄연히 기피자에 대한 처벌규정이 있었고, 전쟁중에는 가중처벌되는 조항도 있었지만 정작 전쟁이 막장으로 접어들게 되면서 하도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병역기피자들을 감옥이 아니라 공장에 보내버리곤 했다.[30] 최전방이라면 감옥보다 전선이 더 지옥같기는 했겠지만, 또 하나의 코미디는 그렇게 해서 막판까지 도망다니다 잡힌 사람들의 경우는 '본토결전 병력 필요+미군 잠수함으로 인한 병력 수송 불가능+걔네한테 줄 무기나 피복 장구류 등등도 어차피 부족' 등등의 이유로 결국은 국민복 입고 죽창 들고는 자기네 동네를 지키는 병력이 되었다는 것... 당장 식민지시대의 조선에만 해도 군대에 끌려갈 것 같아서 몇 달간 도망다니다가 잡히는 바람에 '이제 죽겠구나 했더니' 보낸 곳이 원산이나 함흥의 공장이었다는 사례도 있고, 신성한 병역의 의무랍시고 군복무에 나서게 된 사람들 상당수는 남양군도나 필리핀으로 끌려갔다가 시체조차 돌아오지 못 했는데, 군복무를 피하다가 막판에 잡힌 사람들은 한반도 내에서 뺑이치다 그래도 목숨은 구했다거나 하는 사례들도 허다했다고 한다.
5. 일본 육군이 보유했던 장비목록
6. 관련 문서
[1] 같은 욱일기이지만 중심의 원 모양이 정가운데에 위치한 점이 해군기와 다르다.[2] 육상자위대에게 이 곡을 그대로 계승하여 후지종합화력연습, 중앙관열식, 주둔지개방행사와 같은 대민친선이벤트에서 단골로 연주한다.[3] 대륙과 이어진 반도라는 지형적 요소부터 시작해서, 당장 조선총독만 봐도 해군이나 문관 총독이 여럿 있었던 대만총독부와 달리 조선총독에 해군 출신은 사이토 마코토 제독이 유일했다. 그외에는 전부 육군 장군들. 일본 제국 해군의 경우 조선에 있는 규모있는 해군기지는 진해 요항부 정도만 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해군은 조선인 입대자를 식민지 출신이라 잘 받지도 않았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4] 한국엔 마땅히 비교할만한 기관이 없는데 굳이 따져보면 육군교육사령부와 육군사관학교를 합친 정도?. 두 곳 모두 육군본부 직할로 육군교육사령관과 육사 교장은 중장 보직이다.[5]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국민복이 디자인은 물론 색상까지도 군복과 대동소이 했다. 비슷한 시기 나치 독일도 군복의 사이즈를 줄이다 말년에는 평상복에 휘장이랑 완장만 붙여 국민돌격대에게 지급했다.[6] 전투로 사망한 자는 12명이고 531명은 질병.[7] 전사자는 4만 7천, 나머지는 질병.[8] 공군 창설멤버 7인 중 이근석, 김정렬, 김영환 이 일본 육군항공대 출신이다.[9] 다만 조종사 훈련이나 장비 공급, 편제 등 전반에서 일본군보다 미군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공군 창설 간부 7인이 미군식으로 재훈련을 받으면서까지 도움을 받고자 노력했던 덕분이다.[10] 오늘날의 야마구치현.[11] 대충 따지자면 1등 군인 현역, 2등 군인 예비역, 3등 군인 조센징이다. 여명의 눈동자를 보면 오오에 오장(장항선 분)이 주인공 최대치(최재성 분)가 조센징이라고 각종 학대를 하는데, 옆에서 덤으로 구박 받으며 개무시당하던 중년 남성이 바로 후비역 구보다(박인환 분)이다.[12] 다만 이것도 예외는 있어서 이미 현역 복무를 끝낸 이후 사회 생활을 하다가 대전 말기에 보충병 형식으로 소집된 많은 예비역/후비역 상병장 출신들이 아직 사회 경험이 부족한 농촌 출신 징집병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현역 상병장들을 무시하는 경향도 있었다.(비유하자면 예비군훈련을 받기 위해 동원부대로 온 예비역 병장들이 현역 상병장들을 보는 시선과 비슷하다. 실제로 훈련이나 교육에 돌입할 경우 예비역 병장들이 현역병의 성적을 압도하는 것도 그렇고.) 이는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영화인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에서도 과거 헌병이었다가 상관의 명령을 거역해서 퇴출된 바람에 주인공 부대로 전입 온 현역 상등병이 주인공을 포함한 다수의 예비역과 후비역 출신 소집병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잘 반영되어있다.[13] 재밌는 건 현재 대한민국 현역 징집률이 약 90%이고 몇 년 안으로 95% 이상으로 올릴 예정이다(...)[14] 군생활 해봤으면 알겠지만, 저정도 징집률 때문에 정신지체자에 경계선 지능자에 별의별 환자, A급 관심대상자들 까지 다 군대에 오게 된다. 특히 육군 보병부대에는 이런 인간들이 득실득실 하다. 한마디로 "저런 놈이 어떻게 현역으로 온 거지?"라는 생각이 많이 들거다.[15] 해군의 예이긴 하지만, 나중에 일본 총리까지 지낸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그 케이스였다.[16] 이 경우는 일등병 전역자도 지원은 가능했다.[17] 그때도 사람사는 건 비슷하듯, 경기가 좋을 때와 안 좋을 때의 지원자 상황이 천차만별이었다고 한다.[18] 그 이전에는 오장근무상등병이라 해서 내무실 전체를 책임지는 병사가 있었는데, 이 인원들을 병장으로 승진시켜준 것. 여명의 눈동자에서 오오에가 오장계급을 달고 내무반에서 같이 생활하는 모습이 보통 일본군의 모습은 아니었다. 오장부터는 병사들과 다른곳에서 생활했고, 이게 원래부터 장교와 그 아래 간에 간극이 심했던 일본군에서 하사관과 병사의 간극까지 심해져 문제가 되었다는 견해도 있다.[19] 그러다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30대 후반이나 40대의 상사 행보관, 50세가 다 되어가는 주임원사나 준위 등을 당시 일본군에 그대로 대입하면 오류가 생긴다. 당시 일본군 하사관이라는건 어디까지나 징집병 생활의 연장선상이었고, 그러다 보니 나이들도 20대가 대부분이었다. 상사에 해당하는 조장이나 일본 육군 준위들의 나이도 저 정도로 젊었다. 애시당초 일본군 하사관의 정년은 40세였다. 그것도 준위를 달아야 그 때까지 일 할 수 있었다.[20] 엄밀히 말하면 하사인 오장이나 중사 정도에 해당하는 군조의 경우는 현 한국 부사관들보다 승진이 어렵고 나이도 조금 더 많은 편이지만 그 만큼 대접이 확실한 편이었고 조장으로 진급하는 시기는 한국군의 상사 진급보다 조금 빠르긴 해도(보통 20대 후반 정도라고 한다.) 중대 1인 정도로 진급 가능성 자체는 굉장히 적고 한국군의 상사들처럼 오래 근무하지도 않기 때문에 숫자도 무척 적은 편이었다. 애시당초 조장이나 그 위의 준사관인 준위(해군의 경우는 병조장)의 경우는 이등병에서부터 군생활로 올라온 인원들도 있지만 항공이나 의무 같은 특이한 특기가 있거나 아니면 사관생도 과정 중에 임관 전 임시로 임용되거나 한 인원들도 있어서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힘든 계급이다. 전쟁 말기쯤 가면 하사관 계급의 연령 분화가 극과 극으로 더 심해지는데 20대 중반에 초고속으로 군조나 조장을 단 인원들도 있는가 하면, 예비역이나 후비역으로 징집된 나이 많은 오장이나 군조, 조장들도 존재했다.[21] 이를테면, 당시 일본 시골이나 소도시 같은 곳에 있는 마을 일을 돌보는 일종의 마을회관이나 동사무소 같은 곳에서 일정한 댓가를 받으며 일하는 인원들이 있었는데, 상등병이나 오장 전역자들이 도맡아서 하곤 했다. 마을 청년회 회장 같은걸 일정한 수당을 받고 하는 셈인데, 나름 동네 청년이나 청소년들의 지도자 취급을 받는 자리였고, 그래서인지 마을에서의 대접도 꽤 괜찮은 일자리였다고 한다.[22] 그래봐야 요즘 육군 부사관들같은 정도가 아니라 6년차 퇴역,12년차 퇴역 뭐 이런 정도였다.[23] 요시다 유타카의 '일본의 군대'라는 책에 따르면 군생활 6년 한 하사관은 퇴직 일시금으로 120엔을, 10년 한 하사관은 퇴직 일시금 360엔을 받았으며 군생활 12년 하고 군조 전역시는 은사금으로 연 100엔, 조장 전역시는 연 112엔을 매년 받았다고 했다. 저때 당시 공무원들 월급이 20원이네 30원이네 40원이네 하던 시대였다.[24] 홋카이도에 있으면 병역이 면제된다는 것은 19세기까지 있던 일. 나쓰메 소세키가 대표적이다.[25] 당시 "등대사 사건"을 비롯해서, 군부가 가장 골치아파 하는 집단으로 평가되었다.[26] 군대를 오라고 영장을 보내면, 둘 중 한명은 안 왔다는 소리다.[27] 일제시대 말기에 박헌영이 벽돌공장에서 가명으로 일하면서 숨어있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당시 김두한(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을 비롯한 폭력배들도 건설대를 비롯한 활동을 통해서 징병을 피했다.[28] 책 "어느 하급장교가 바라본 일본제국의 육군"[29] 위에도 나왔지만 현역 필한 자가 중일전쟁 전만 해도 다섯 중 하나, 중일전쟁 이후에도 40년대 초반까지는 셋 중 하나 정도였다.[30] 이게 1944년을 전후로 해서 분위기가 바뀐 것이다. 그 전의 일본군은 나름 정예의식이 있었고, 따라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인원은 최대한 받지 않으려고 했었다. 조선인들의 입대를 미루고 미루다 병력이 부족해지자 마지못해 하게 된 것도 비슷한 맥락... 태평양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고등교육 받은 사람을 병사로 징집하면 괜히 배운놈들이 말 많고 분란 일으키고 해서 병영 분위기가 안 좋아진다면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어지간하면 예비역 장교 정도로 얼렁뚱땅 병역을 때우게 했을 정도였다. [31] 전부 육군출신.[32]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육군 소속&건조 잠수함이다![33] 일본 육군의 장비 중에 가장 비밀스러운 떡밥투성이 장비다. 현재 이걸 전시 중인 러시아 측에서도 분해금지가 걸려 있다.[34] 위에 있는 삼식잠항수송정과 더불어 세계 최초이자 유일한 육군 소속&건조 항공모함이다!